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경궁 명정전 (문단 편집) == 구조 ==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창경궁_명정전_후면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명정전 뒤편에 붙어있는 복도. 왼쪽 복도는 빈양문 및 숭문당과, 오른쪽 복도는 문정전과 붙어있다.[* [[http://www.heritage.go.kr/heri/cul/imgHeritage.do?ccimId=1611761&ccbaKdcd=11&ccbaAsno=02260000&ccbaCtcd=11|사진 출처 -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.]]] '''}}} || 다른 궁궐의 정전에 비해 굉장히 규모가 작은 편이다. 애당초 [[창경궁]]이 임금이 정식으로 머물 궁으로 지은 게 아니라 [[창덕궁]]에 딸린 대비궁으로 지은 것이라 그렇다. 층도 단층에 터 크기 자체도 [[경복궁 근정전]], [[창덕궁 인정전]]보다 훨씬 작다. 또한 독립된 월대를 가진 다른 정전과 다르게 건물 뒤편에 바로 붙어있는 복도 1쌍만 지나면 바로 [[창경궁 문정전|문정전]], [[창경궁 숭문당|숭문당]], [[창경궁 빈양문|빈양문]] 등 다른 건물 영역으로 연결될 정도이다. * 석축기단 2단 위에 정면 5칸, 측면 3칸의 1층 전각[* 보통 전통 건축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(單層)으로 말한다.]이다.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포의 짜임새가 견실하고 쇠서[* 소의 혀란 뜻으로,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, 끝을 [[소]]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를 말한다. 첨차의 뜻은 후술.]의 곡선이 힘차고 예리한 점, 첨차[* 공포를 구성하는 나무 부재.]에 풀무늬를 새긴 수법이 세련된 점, 주춧돌에서 공포까지의 지지체(支持體)와 그 위에 얹은 지붕의 균형이 잘 조화된 점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. 그래서 그런지 몇몇 학자들이 [[임진왜란]] 때 불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 적도 있으나 《[[조선왕조실록]]》의 기사와 1963년 합각머리 안쪽에서 발견된 묵서명(墨書銘)의 내용이 일치하여, [[광해군]] 때 재건한 것을 확인했다. * 외곽을 둘러싸는 16개의 일반 기둥[* 평주(平柱).]와 내부 전면(前面)에만 배치된 [[크고 아름다운|크고 --아름다운-- 높은]] 기둥 4개[* 고주(高柱).]로 형성되어 있다. 전면과 후면 어칸에는 꽃처럼 창살을 만든 사분합문, 좌우 협칸에는 삼분합문, 그리고 툇칸에는 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고, 좌 · 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부는 회색벽돌로 12단 쌓아 화방벽(火防壁)으로 조성했다.[* 이것은 [[창덕궁 인정전]]도 마찬가지였는데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황제]]의 이어 이후 현재와 같은 머름으로 변했다.] 좌우 측면 중앙칸에는 삼분합문이 설치되었고, 좌·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단은 정면을 후면과 마찬가지로 회색벽돌로 12단 쌓았다. 분합문과 창 상부에는 모두 광창[* 光窓. 어두운 실내를 밝혀주기 위하여 설치하는 창.]을 설치했으며,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고, 내부 중앙 뒤에 어좌를 설치했다.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562617&cid=46656&categoryId=46656|출처.]]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창경궁_명정전_내부_어좌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명정전 내부[* [[http://www.heritage.go.kr/heri/cul/imgHeritage.do?ccimId=6405701&ccbaKdcd=11&ccbaAsno=02260000&ccbaCtcd=11|사진 출처 -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.]]] '''}}} ||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창경궁_명정전의_천장과_내부공포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명정전 천장에 달린 봉황 조각[* [[http://www.heritage.go.kr/heri/cul/imgHeritage.do?ccimId=6400922&ccbaKdcd=11&ccbaAsno=02250000&ccbaCtcd=11|사진 출처 -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.]]] '''}}} || 실내 [[천장]] 가운데에는 금박을 입힌 [[봉황]] 두 마리가 걸려있다. 아무래도 [[제후|제후국]]의 [[궁|대비궁]]으로 지은 것이다 보니 그런 듯하다. [[답도]]에도 봉황이 새겨져 있다. * [[8.15 광복]] 이후 명정전 조정 뜰에 품계석[* 品階石. 신하들이 서열에 맞게 서있을 위치를 나타내는 돌.]을 세워두었지만, 원래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. [[https://blog.naver.com/minsu977/221291301662|이 포스팅]]에 따르면, 품계석은 법궁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[[경복궁]], [[창덕궁]](경복궁 중건 이전 조선 후기 사실상 법궁), [[덕수궁|경운궁]](대한제국 광무 연간 법궁) 조정에만 세웠다는 것이다. 실제로 조선시대 [[창덕궁]]과 [[창경궁]]을 그린 〈[[동궐도]]〉와 〈동궐도형〉을 보면, [[창덕궁 인정전]] 뜰에는 품계석이 있지만 명정전 뜰에는 없다. 이밖의 다른 조선시대나 구한말에 제작한 자료에도 명정전 품계석은 보이지 않는다.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창경궁 명정문과 명정전의 축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 홍화문, 옥천교, 명정문, 명정전의 축 '''}}} || 동향을 하고 있는데 앞에 이어지는 [[창경궁 명정문|명정문]], [[창경궁 홍화문|홍화문]]과 일직선상으로 맞지 않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